『SO,BE』展
전시주제
본 전시는 소비문화가 은근하게 내포하고 있던 치밀한 자본주의 시장의 흐름에 물음표를 던지고자 한다. 권력자들이 의도한 선상에 놓인 소비 주체의 실체는 여전히 규정되지 않지만, 물음표에 대한 우리들의 대답이 비가시적 해답이라 하여 침묵할 수는 없다. 문화의 형성에는 사회 지배계층의 개입이 불가피하며, 이는 자본을 바탕으로 움직일 때 그 성격이 더욱 강해진다. 소비문화는 자본주의 시장과 맞물려 형성되어 있기에 문화적 파급력이 강해질수록 그들의 암묵적 개입을 자각하는 대중들의 자발적인 면피 역시 확대된다. 전시는 각 섹션을 통해, 이러한 소비의 양면적 성질이 지배하는 그 중간 어디쯤 모호한 경계에 서 있는 우리의 모습을 자각하게 한다. 소비란 절대적인 취향으로 개인의 정체성을 발현하는 하나의 도구인가, 사회적 권력이 조장하는 의도적인 현상적 결과물인가. 그 고민을 관철하는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서, 당신에게 소비란 무엇입니까? 라는 물음에 우리의 대답은 어떠한가. 우리는 이 물음표에 대한 제3의 해답을 찾기 위해 아직 이곳에 서 있다.
기획의도
본 전시는 발전하는 소비의 행보를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아 현시대에 소비문화를 형성하는 주축에 대하여 물음표를 던지며, 소비 주체의 방향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눈다.
첫 번째는 유착된 정체성이다. 필요에 의한 생필품을 구매하는 생산적 소비의 시대를 뒤로하고 오늘날 소비는 개인적 만족을 넘어 사회적인 관계성을 내포하고 있다. 개인이 무엇을 소비하는지에 따라 타인 및 사회와의 관계가 재정립되는 소비의 ‘사회적 관계성’은 개인의 취향보다 더 깊숙하게 소비자의 무의식을 지배한다. ‘현시선호이론(theory of revealed preference)’에서의 소비자는 합리적인 소비를 위해 지불하는 값에 대한 선호순서를 끝없이 고찰하는 존재이며, 이는 개인의 무의식이 소비의 큰 틀을 지배하는 소비의 본질에 부합한다. 흥미로운 점은, 지금의 소비자들은 소비에 내재하여 있는 사회적 관계성을 은근하게 제1의 선호순서로 놓고 있다는 것이다. 관계성에 대한 이와 같은 대중들의 타성적인 태도는 사회적 관계에서 비롯된 개인의 정체성을 발현하려는 욕구로 유착되어 소비문화의 커다란 맥으로 자리 잡았다.
두 번째는 의도된 권력이다. 전시는 소비행위의 흐름 자체를 사회적 권력이 움직이는 의도된 현상으로 여길 것인지에 대해 질문하고 있다. 가변하는 소비의 맥락과는 달리 공급자의 최종 목적지는 여전히 ‘이윤 창출’이며, ‘생산자 선택의 이론(theory of producer's choice)’에 따라 공급자는 철저하게 이윤을 중심으로 생산을 계획한다. 현시점에서의 이윤이란 단순한 재화뿐 아니라 사회·문화·정치 등 국가 차원의 사회 현상을 지배계층이 원하는 방향으로 만들어내는 것을 내포한다. 즉, 사회 지배계층은 공급자에 형상하여 소비의 행보에 의도적으로 개입하여 권력을 행사한다. 그들은 대량생산이나 과잉생산뿐만 아니라 특정상품 및 문화를 트렌드로 탈바꿈하는 등 가시적으로 구체화하기 어려운 소비자의 무의식에 접근해 다분히 목적성을 띤 채 통제함을 시도한다. 상당히 강제적인 주입이지만 실체는 정의하기 모호한 현상으로만 남는다.
김동진 작가순간의 방치와 가중된 무게의 인과관계
원범식 작가르네 데카르트 René Descartes는 한 명의 건축가가 설계한 건물의 질서정연함을 아름답다 하였지만, [건축조각 Archisculpture] 사진 프로젝트는 여러 건축가의 다양한 건축물을 촬영하고, 이를 콜라주 해 건축적 조각품의 이미지를 만드는 것이 그 목적이다. 따라서, [건축조각] 사진은 자연 발생적으로 여러 건축가에 의해 이뤄진 고대 도시의 유기적 낭만성과 성격이 비슷하기도 하고, 또 다르기도 한데, 그 이유는 다수 건축가의 수많은 설계에 대한 본인의 주관적인 해석과 선택이기 때문이다. 사진에 '푼크툼 punctum'이 있다면, 분명 이곳에 사용된 건축물들은 어떤 면에선 작가의 '푼크툼'이며 이들의 조합이 바로 [건축조각] 사진이다. 또한, 정치, 경제, 사회의 상징적 건축물을 찾아 서로 연결하기도 하기에 감상자는 ‘스투디움 studium’을 통해 [건축조각]으로부터 대도시의 환영을 느끼기도 한다. 수집가가 획득물을 세심히 분류하고 정리하듯, 작가는 이곳저곳에서 채집한 도시의 파편들을 분석하고 이를 재료로 조각품을 만든다. 이때 개개의 건축물들은 통시적 또는 공시적 역사를 지닌, 혹은 그 모두를 담고 있는 아름다운 조각으로 재탄생된다. 이 과정에 사용된 콜라주 기법은 러시아 영화감독 에이젠슈타인이 몽타주에 관해 설명한 것처럼 각 요소를 충돌시키면서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어쨌거나 본질에서 이것은 존재하지 않는 건축적 형태를 지닌 조각품의 사진이다.
육효진 작가과거의 쪽방과 현재 대한민국의 쪽방인 고시원은 창의 유무에 따라 가격이 달라진다. 겨우 몸을 뉘일 수 있는 한 평 남짓한 곳에서의 작은 창은 거주하는 이의 숨구멍이자 바깥세상과 소통하기 위한 최소한의 연결고리이다. 하지만 그 좁쌀만 한 창에 매겨지는 값은 자본주의 사회의 ‘값’에 대한 상징과 다름 아니다. 그것은 곧 신분이고 위치이며 자리이다. 창을 통해 집과 사회적 구조의 관계성에 대해 질문한다. 작품으로 표현된 ‘금빛 문’, ‘소금’, ‘판도라의 상자’ 등은 추상적 이미지를 하고 있으나 실제론 값의 경계, 구조의 경계, 계층의 경계를 되묻는 장치라고 할 수 있다. 금빛 문 연작은 크기가 제 각각인데다 입체, 부조로 다양한 모습을 하고 있다. 이 작품들은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은 내면의식과 외부와의 소통, 주체와 타자 간 상호성의 문제를 거론한다. 역사와 상황, 현상, 사건들이 들어있고 현재와 미래, 절망과 희망이 뒤범벅되어 있다. 판도라의 상자는 문명적 삶과 그 삶들의 조합, 공간성과 더불어 ‘공소(空所)’의 배경, 상자 맨 밑바닥에 있던 ‘희망’을 공유한다. 여기서 희망은 관람자마다 개별적일 수밖에 없고, 저마다 가치도 다르지만, 시간의 얼개에 따라 현재의 시간에서 파편화된다는 공통점은 있다. 그건 작가에 의해 선택되어진 여러 기호들로부터 빚어진 최종의 메시지다.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 때부터 인간이 온갖 불행을 겪으며 살게 되었다면, 이젠 멈춰도 되지 않느냐는 주문-절망이 아닌 새로운 무언가를 인위적으로라도 채우거나 투사하고픈 작가의 마음이 깃들어 있는 셈이다. 현장설치작업으로 우리네 삶에 주어진 유무형의 경계를 허물고자 한다. 궁극적으론 동시대 삶의 리얼리티를 소환한다.
이지은 작가데님을 이용한 추상 표현으로 청바지를 통해 현대인의 변화와 흐름을 표현 중에 있다. 물질적, 비물질적 정신 세계를 구현하는데 있어서 추상의 본질적 의미를 깨달으며 현대의 추상으로 예술 의지를 확장시키는 중이다.
이한슬 작가 나의 작업은 쇼핑거리의 풍경을 반복적으로 재현한다. 이러한 반복은 작품제작 방법에서도 찾을 수 있다. 화면에 테이프를 찢어 붙이고 색칠을 한 후 그 테이프를 떼어내는 행위를 반복한다. 그런 작업 방식에서 작품의 이미지는 균일하지 않은, 중첩된 여러 겹의 층이 생긴다. 이렇게 표현된 표면은 우연한 효과가 나타나고, 가까이 들여다보면 뜯겨진 껍질처럼 거칠다. 색 면들을 껍질처럼 쌓아 올리는 과정은 소비의 반복 강박과 닮아있다. 같은 행위라도 여러 번 반복되어 다른 결과를 낳는 반성성이 있는 행위가 아니라 자본이 만들어낸 환상의 참조 점에 기대어 똑같은 행동과 똑같은 결과를 무수히 반복만 하는 행위, 즉 충족될 수 없는 욕망을 재현하는 강박이 아닐까? 그동안 거대한 기업의 브랜드 이미지가 생활의 일상 이미지로 수용되는 과정에서 나타난 당연한 결과인 듯하다. 우리는 더 이상 무언가를 스스로 결정 할 수 있는 욕망의 주체가 아니라 자본에 의해 대상화된 주체가 되어버린 것 같다.
심지훈 작가나의작업은면을해체->재구성하는것, TEXT와오브제를이용하는작업을통해색면구성(color-field composition)와포토콜라주/몽타주로확장해왔다. 도형을기하학적색면구성(해체하고재구성하는)을통해하나의유기적인화면을만들어내고그속에포토콜라주/몽타주를배치시킴으로써여러가지의내러티브를가지고자한다. 색면구성그리고포토콜라주/몽타주조형실험.